파이란. 엄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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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는 세상에서 제일 호구다. 건달인데, 동네 청소년이나 오락실에서 삥뜯고 다닌다. 예전에도 못 나갔지만, 포르노비디오 유통 때문에 감옥을 다녀와보니 더더욱 꼬락서니가 한심하다. 조직의 후배들은 자신의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고, 동기였던 넘은 대장이 되어버렸다. 애매하게 족보가 꼬였다. 그래도 후배들에게 뭐라도 보여줄라고 하다가 여린 마음때문에 그냥 수모만 당하고 만다. 그러던 와중 동기였던 대장넘이 홧김에 라이벌조직의 대장을 죽이는 현장에 같이 있었고, 시체유기를 도와준 뒤에 모든 걸 뒤집어쓰고 감옥에 갈 팔자가 된다. 그리고,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을 향해 떠난다.


그에겐 서류상 결혼한 장백란이라는 중국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천애고아로 마지막 남은 핏줄을 찾아 한국에 왔다가 홀로 남겨져버린 불쌍한 인물이다. 인신매매로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 팔려가 세탁소에서 일을 하면서 힘들게 산다.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 건 서류상 남편인 강재의 사진뿐이다. 그녀는 강재에게 편지를 쓴다. 강재씨가 세상에서 제일 친절하다고. 뭐 어찌됐던 강재씨가 세상에서 제일 친절하다고. 자기랑 결혼해줬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이 편지를 전하지 못한 채 결국 병이 깊어져 죽고 만다.


장례식을 향해 떠나던 강재는 장백란이란 여자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다. 사진을 보고, 자신에게 남겨진 편지를 본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이 여자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친절하다 한다. 그저 서류하나 줬을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스스로 포기했던 한 인격으로서의 품위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증거를 평생 처음으로 알았다. 슬픈 건 그녀는 죽어버렸다는 거다. 강재가 할 수 있는 건 가장 만만한 자기 친구한테 술주정을 부리고 경찰관이나 인신매매포주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 뿐이다.


강재는 서울로 돌아와 동기였던 대장넘에게 그 대신 감옥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집에 돌아와 우연히 녹화되어있던 장백란의 비디오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동기였던 대장이 보낸 자객에 손에 죽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어머니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나란 존재는 세상에 나와서 힘들 때가 너무 많다. 사람들은 모두가 나를 이용하려고만 하지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 나마저 나의 가치를 잊어버린다. 하지만 세상에 단 한 사람 나의 어머니 만큼은 아무 이유없이 나를 사랑해준다. 단순히 내가 그녀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 혹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다. 그냥 내가 그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많은 사람의 경우 어머니가 떠난 다음이라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나락으로 떨어져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는데, 어머니가 없다. 슬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머니와 아들은 슬픈 관계다.


마지막에 강재는 자신이 하기로 했던 것들을 모두 파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 하지만 결국 자객에게 죽는다. 한 번 세상에서 찌들은 사람은 어머니를 핑계로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리셋하기를 원하지만 세상은 그런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냥 찌든 채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속세에서는 죽음에 필적하는 처벌을 받게되는 것이다. 인생은 비가역적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다. 내가 선택한 결과들이 누적되어 도달한 그 위치는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무게다. 내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지 않고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가장 나를 존중하고 싶을 때, 가장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을 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무거운 인생의 굴레다. 파이란을 놓치지 않으려면, 항상 나에게, 그리고 파이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살아야한다.

비긴 어게인.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상처를 받을 때는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다. 연인관계라면 내가 관계에 소홀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방이 바람을 피는 경우이고(그레타, 댄), 가족 관계에서는 아이들 입장에서 자신이 잘못한 바가 없는데 부모가 이혼해 가정이 불행한 경우다(바이올렛).

내 탓이 아님에도 망가진 관계가 마치 자기 잘못인 것 처럼 느껴져 댄은 일과 자기자신에 소홀해지고, 바이올렛은 되바라져버린다. 5년을 함께한 애인이 뜨고 나서 자기를 차버린 그레타 역시 상실감에 빠져 의기소침하다. 보통 이런 경우에 다시 대화를 하고 진솔하게 마음을 열어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지만, 상처를 입은 쪽은 억울해서, 상처를 준 쪽은 미안해서 대화자체가 어렵다. 그럴 때 오히려 관계의 회복의 열쇠가 되는 것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일 수 있다.

관계 자체에 자신감이 없어진 그 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모티베이션을 주며 주관적인 관점에서 생각이 고착되어버린 기존의 관계를 제 3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댄은 그레타를 만나 음악을 만들면서 자신의 원래 재능이었던 프로듀싱에 대한 자신감을 재발견한다. 그레타에게 자신의 아픈 상처 이야기를 털어내고 위로받는다. 딸인 바이올렛과의 사이도 그레타의 도움으로 회복된다.

이 모든 장면들을 구구절절히 대사와 연기만으로 풀어냈다면 이 영화는 이렇게 흥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각 장면에 들어간 음악들로 설명을 대신한다. 시청자는 말이 아니라 음악으로 동감한다. 댄이 그레타에게 아픈 상처이야기를 꺼내고 더블 덱으로 재즈음악을 들으며 뉴욕거리를 활보하는 장면, 딸 바이올렛의 기타와 댄의 베이스 연주로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는 장면, 그레타가 준 LOST STARS 노래를 공연장에서 부르는 데이브를 보며 결국 그레타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장면은 압권이다. 말보다 음악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사람으로 만들어진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 치유된다. 음악과 함께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